자아를 알고 있나요?
우리는 윗세대들로부터 “예의 발라야 한다”,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엄격한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사회 속에서 이런 모습은 ‘절제력과 책임감이 강하다’고 불리며 본받을 점으로 비춰집니다. 저 역시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고, 사회적 규율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정답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해왔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주변에서 ‘어른스럽다‘고 하기에 그것이 성숙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심리학을 공부하며 깨달은 사실은 제가 추구했던 그 ‘완벽함’이 오히려 미성숙한 사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친 자기 통제와 완벽주의 성향은 제 자아를 가두고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마음의 세 가지 기둥: 원초아, 자아, 그리고 초자아
잠시 이론적인 설명을 하겠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 마음 속의 세 가지 부분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행동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 원초아(Id): 욕구와 쾌락을 추구하는 ‘내 안의 본능적인 아이’입니다. 생명력의 원천이지만 조절되지 않으면 충동적이고 직선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 초자아(Superego): 도덕, 양심, 사회적 규범을 담당하는 ‘내 안의 엄격한 판사’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억압합니다.
- 자아(Ego): 현실을 직시하고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를 중재하는 ‘내 안의 합리적인 집행관’입니다.
학자마다 ‘자아’에 대한 관점이 다른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정신역동)에서는 자아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는 것이 제가 오늘의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완벽주의가 ‘미성숙함’의 증거인 이유
심리학 수업 중 교수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신의학에서 가장 깊게 들여다보고 경계해야 할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완벽주의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이고 완벽한 사람이 성숙하다고 믿지만, 사실 초자아가 자아를 압도하는 상태는 심리학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초자아는 내가 주체적으로 만든 기준이 아니라, 외부(부모, 사회)의 가치관을 비판 없이 흡수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에 맡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성숙은 초자아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옳은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아(Ego)의 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회의 기준이 아닌 ‘나의 자아’를 찾는 여정
건강한 삶,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을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원초아(욕구)와 초자아(통제)가 팽팽한 균형 또는 갈등을 이루었을 때, 그 사이에서 자아가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면(페르소나)’가 아닌, 진짜 나의 자아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 원초아를 인정하기: 나의 욕구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사고는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인정은 하되, 당연히 적당한 조절은 필요합니다.
- 초자아의 채찍질 멈추기: 사회가 심어준 ‘맞다, 좋다, 잘한다’의 기준 및 인식이 과연 지금의 나에게 ‘맞는지, 좋은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 자아의 주도권 되찾기: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 이렇게 하라고 배워왔지만, “나의 가치관에 따라 이렇게 선택하겠어”, “느리면 어때, 대신 원하는 것들을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어” 나를 존중하는 주체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마치며: 완벽하’지 않으’려고 애쓰기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를 찾는 것이 삶의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숙제입니다.
자꾸만 스스로를 통제하려 드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정작 내면의 목소리는 방치했던 시간들은 참된 자아를 잊어버리는 미성숙한 행동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완벽주의를 그토록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이유는, 우리 내면에 깊게 내재된 결핍이나 불안이 인간 본연의 고유한 생동감과 에너지를 ‘스스로’ 갉아먹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굳이 ‘스스로’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완벽주의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결국 본인 자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시시때때로 발동되는 강한 초자아의 채찍질을 어찌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을 우리는 이미 많이 겪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완벽주의는 특정한 양상이 정해진 여타의 히스테리적 증상들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인이 내면 깊숙이 넓게 퍼져 있어 우울, 불안, 강박 이외에 수많은 정신적·심리적 병증을 전방위적으로 초래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결국, 특정 질환보다 더 다루기 까다롭고 방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뿌리가 바로 이 완벽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자아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만큼은 내 안의 엄격한 판사(초자아)를 잠시 쉬게 하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주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규율을 조금 어겨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본능과 규범 사이에서 나만의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그 모습 자체가 이미 가장 성숙한 진화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용기
완벽주의가 초래하기 쉬운 수많은 심리적 질병으로부터 나를 구출하는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완벽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사회적 규율을 조금 어겨도,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완벽할 때가 아니라, 비로소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순간 가장 안전하고 행복합니다.